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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비람의 소설선

2024년 이병주국제문학상 대상 수상 김종성 작가의 [가야를 찾아서]

by 서연비람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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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가야사를 소재로 한 5편의 중‧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 『가야를 찾아서』
500년 간 가야 문명의 꽃을 피운 가야를 찾아 나선 김종성 소설가의 가야사 탐구

소설가 김종성은 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최인훈‧한무숙 선생의 선(選)으로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래 3권의 연작소설집을 펴냈다. 첫 번째 연작소설집은 탄광촌을 무대로 한 『탄(炭)』(미래사, 1988년)이고, 두 번째 연작소설집은 서울 강남에서 좌석버스를 타면 1시간이면 닿는 도농복합도시 초림을 무대로 한 『마을』(실천문학사, 2009년)이다. 세 번째 연작소설집 『가야를 찾아서』(서연비람, 2024년)는 현대의 서울과 고대의 가락국(김해) 및 가라국(고령)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가야를 찾아서』는 액자식 구성(frame narrative)을 도입해 ’바깥 이야기‘로 「가야를 찾아서」와 「가야를 위하여」를 배치하고 ’안 이야기‘로 「님의 나라」‧「가락국」‧「검(劍)과 현(弦)」을 배치했다. ’바깥 이야기‘인 「가야를 찾아서」‧ 「가야를 위하여」는 화자가 1인칭이다. 그리고 ’안 이야기‘인 「님의 나라」는 화자가 1인칭이다. 또한 ’안 이야기‘인 「가락국」‧「검과 현」의 화자는 3인칭이다. ’안 이야기‘에서 「님의 나라」는 시간적 배경이 현대이고, 「가락국」과 「검과 현」은 시간적 배경이 고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서울에서 ‘가야유물특별전, 국립중앙박물관 8.5〜9.2’를 개최했던 1991년을 시간적 공간으로 하여 집필한 「가야를 찾아서」와 28년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야본성(加耶本性)-칼(劒)과 현(絃) 2019. 12. 3.(화)-2020. 3. 1.(일)’을 개최했던 2020년을 시간적 공간으로 하여 집필한 「가야를 위하여」의 발표 시기는 31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


목차

가야를 찾아서
가락국
님의 나라
검(劍)과 현(弦)
가야를 위하여
작가의 말
가야사 연표


저자 소개

김종성 지음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태백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 졸업 및 경희대 대학원 국문학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2004년).
1986년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2006년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 『탄(炭)』(미래사, 1988년), 『마을』(실천문학사, 2009년), 『가야를 찾아서』(서연비람, 2024년) 출간. 중단편집 『금지된 문』(풀빛, 1993년),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년),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년) 등 출간.
연구서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년),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년), 『한국어 어휘와 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년),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년),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년),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년) 등 출간.
장안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및 경희대 국문학과 겸임교수와 고려대 세종캠퍼스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


저자의 말

두 마리의 물고기(雙魚)가 많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중‧단편소설 5편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가야를 찾아서』는 「가야를 찾아서」(《현대문학》, 1992년 1월호)‧「가야를 위하여」(《시와 문화》 2023년 봄호) 등 2편의 단편소설과 「님의 나라」(계간 《동서문학》 1993년 겨울호)‧ 「가락국」(「허황옥」의 개제(『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1』, 서연비람, 2022년 12월)‧「검과 현」(「우륵」의 개제(『소설로 읽는 한국음악사1』, 서연비람, 2023년 8월) 등 3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연작소설 『가야를 찾아서』를 집필하기 위해 가야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가야사를 둘러싸고 고대의 가야 소국(小國)들이 영남과 호남의 각 지역에 자리잡고 멸망할 때까지 공존과 경쟁 양상을 보이면서 병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가야사는 한국 고대사에서 그 실체가 가장 밝혀지지 않은 것 중의 하나이다. 문헌 자료가 크게 부족한 데다가 임나일본부 문제가 가야사와 얽혀 있었기 때문에 가야사 연구를 부진하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992년 단편소설 「가야를 찾아서」를 발표한 이후에 가야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겠다는 열망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살아왔던 나는 1993년 중편소설 「님의 나라」를 발표한 후에도 오랫동안 가야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지 못하다가 2022년 중편소설 「가락국」을 필두로 2023년에 중편소설 「검과 현」과 단편소설 「가야를 위하여」를 발표했다. 나는 ‘가야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연작소설집을 묶겠다고 마음먹고 6개월 동안 개작하는 작업을 했다. 5편의 중‧단편 소설을 연작소설로 개작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표했을 때와 내용이 상당히 다른 작품이 되었다. 에피소드를 삭제하기도 하고, 에피소드를 추가하기도 하고, 작품간에 에피소드를 이동시키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이름과 개개의 작품의 제목을 바꾸기도 하면서 개작 작업에 매달렸다. 그 결과 연작소설 『가야를 찾아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추천사

김종성은 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2권의 연작소설집을 펴낸 김종성의 세 번째 연작소설집 『가야를 찾아서』는 액자식 구성(frame narrative)을 도입해 ‘바깥 이야기’로 「가야를 찾아서」와 「가야를 위하여」를 배치하고 ‘안 이야기’로 「님의 나라」‧「가락국」‧「검(劍)과 현(弦)」을 배치했다. 이 소설집에서 우리는 많은 인물의 삶과 그 궤적을 만나게 된다. 「가야를 찾아서」는 밥벌이를 위해 광고 영업을 하러 구두 뒤창이 닳도록 뛰어다니면서도 가야사에 미쳐 있는 한 사내의 일상을 묘사한다. 「가락국」은 가락국이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끼어 한나라를 따랐다가 흉노를 따랐다가 하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모래 속에 묻혀버린 누란(樓蘭)과 같은 운명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가락국의 존립을 위해 분투하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모습을 그린다. 그런가 하면 「님의 나라」는 가야 고분을 발굴하여 고고학 자료가 출토될 때마다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학계와 언론의 허구를 잡지사 기자의 눈을 통해 그린다. 「검(劍)과 현(弦)」은 백제와 신라의 침략에 맞서 가야 소국들이 존립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현(弦)으로 상징되는 우륵의 예술이 검(劍)으로 상징되는 성왕‧진흥왕‧가실왕의 정치에 맞서는 서사를 그린다. 「가야를 위하여」에서는 서울로 가서 공부해보겠다는 꿈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탄광촌에서 몸부림친 지 15년 만에 34살의 나이에 대학 사학과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은 사내가 “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게 한 것은 역사서였다”고 술회한다.
김종성은 이와 같은 작품에서 탄탄한 묘사력과 풍부한 어휘력을 구사하면서 시대적 삶의 본질과 진실에 대한 굳건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일독을 권할 만한 뜻깊은 소설이다.


책 속으로

p.14

마침내 해외 광고업계에서 매출 1, 2위를 다투는 광고 회사의 차장 자리에 오른 나는 머지않아 부장 자리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젖어, 서울과 부천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감도, 차장 자리도, 저녁 늦게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동차 속에서 한강 위에 드문드문 떠 있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더해주곤 했다. 앞만 보고 달음질치는 아프리카의 산양(山羊), 스프링복처럼 앞만 보고 질주해온 나였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팩시밀리가 작동하는 소리, 인터폰 신호음, 전동타자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나는 혼자 버려져 있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봉황성을 떠나간 가락국(금관가야) 왕들의 이름을 기획안 용지에 긁적거려보곤 했다.
수로왕, 거등왕, 마품왕, 거즐미왕, 이시품왕, 좌지왕, 취희왕, 질지왕, 겸지왕, 구형왕.

p.34

버스의 차창으로 야트막한 산줄기가 솟아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그날 현 교수가 텔레비전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고 하던 말을 떠올렸다. 신녀(神女)와 함께 구름을 타고 진세(塵世)를 떠나가다니… 나는 구름을 타고 진세를 떠나간 왕자 주(伷)의 생각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 나는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허망하다고 생각했다. 광고회사 차장 민기오가 아니라, 사학자 민기오로 지금 이 여행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p.39

가락국이라는 소국(小國)이 동아시아사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서기 42년이다. 가락국은 사서(史書)에 가야ㆍ금관국ㆍ남가야(南加耶)‧대가락(大駕洛)‧가야국‧임나가라‧가라‧남가라‧금관 가야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서기 43년(수로왕 2년) 봄 정월이었다.
“짐이 도성을 정하여 설치하려고 한다.”
수로왕이 좌중에 둘러선 구간(九干)들을 향해 말했다.

p.72~73

가락국의 도성인 봉황성은 바닷길로 서해안과 남해안의 모든 항구, 그리고 한(漢)나라와 왜(倭)로 통할 수 있었고, 낙동강 물길을 이용해 영남 내륙 깊숙이까지 오갈 수 있었던 관문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가락국은 물길과 바닷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관문을 차지해 물길ㆍ바닷길 교통, 그리고 교역의 요지로서 한반도 남부 변한의 소국들 가운데 맨 위층에 자리 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철과 물길과 바닷길이 풀무질한 교역의 거점인 가락국은 천구(天球) 위에 구름 띠 모양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천체(天體)의 무리인 은하의 중심부처럼 변한 정치집단의 중심부가 된 것이었다. 관문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가락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국일수록 교통과 교역의 중요도가 떨어져 낙동강과 남해 연안에 점점이 박혀 있는 소국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게 되었다. 반로국ㆍ감로국ㆍ접도국ㆍ고순시국ㆍ낙노국ㆍ주조마국 같은 소국들이 그러했다.

p.101~102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 취재하러 갔다가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금 교수를 만나, 그의 「금관가야 사회의 발전과 경제」라는 논문을 한 편 얻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논문의 본론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숭신기(崇神紀)」 65년 조 기사를 먼저 소개하고 있었다.

임나는 쓰쿠시노 쿠니(筑紫國)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任那者(임나자), 去築紫國二千餘里(거축자국이천여리),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북조해이재계림지서남).

쓰쿠시노 쿠니는 지금의 후쿠오카(福岡)이고, 계림은 신라를 가리킨다. 문제는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라는 기사다. 지금의 김해시 지역과 그 인근 지역에 관한 고고학과 지리학 연구에 의하면 현재의 김해평야 대부분은 신석기 중기에 형성된 ‘고 김해만(古金海灣)’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깊숙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주남저수지 일대도 기원전 1세기 다호리고분군 축조 세력이 자리를 잡았던 ‘고 대산만(古大山灣)’이라는 큰 만(灣)을 이루고 있었다.
금 교수는 『일본서기』「숭신기」 65년 조 기사가 고대 김해 지역의 지리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p.112~113

가야 관계 기사는 1970년대 말부터 간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봇물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부산, 대구, 경상남도 일원의 대학들이 가야 고분에서 수많은 가야 유물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마다 뉴스로 크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가야 관계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유물 발굴 기사 첫머리나 끝에 반드시 ‘일본’과 ‘임나일본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5세기 무렵 가야와 일본 간의 문화 교류 양상을 알려준다’, ‘일본에 문화 수출 결정적 입증’, ‘고대문화 일본 전파 중심지’에서부터 ‘임나일본부 허구성 입증’, ‘일본의 임나 지배설 허구’, ‘임나일본부설 허구 자인’에 이르기까지 가야 관계 기사는 온통 일본에 영향을 끼친 유물이라느니,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을 입증했다느니 하는 꼬리표가 꼭 붙어 다녔다.

p.197~198

이뇌왕과 비조부의 누이 사이에 태어난 월광태자 대신 상수위(上首位) 고전해를 비롯한 친(親)백제계 신하들의 추대로 가실왕이 왕위에 올랐다. 친백제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자, 반로국은 다시 신라와 멀어졌다. 신라인의 피가 섞여 있는 월광태자와 신라 출신 비(妃)인 비조부의 누이는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비조부의 누이와 월광태자는 칠흑 같은 야음을 타서 황산하를 건너 신라로 달아났다. 신라는 반로국의 비와 월광태자로부터 반로국의 사정을 샅샅이 듣게 되었다.

p.282

그 후 우륵은 세 제자에게 자신이 지은 12곡도 가르쳐주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을 배운 세 제자는 12곡이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우륵은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아 눈알이 곤두섰다. 그러나 새로 줄인 5곡을 모두 듣고 난 뒤에는 눈물을 흘렸다.
“공자께서 ‘『시경』의 「관저(關雎)」는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프면서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즐거우면서도 지나치게 즐겁지 않고, 슬프면서도 지나치게 슬프지 않구나. 이것이 정말 바른 음악이로구나.” 우륵이 말했다.

p.317

“이 책은 내가 자동차 정비공을 하며 교원검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 보던 책인데 민기오, 너에게 주마. 독학하다 보면 앞이 꽉 막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닥칠 때도 있을 거야. 그때마다 역사책을 읽어라. 역사책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세상을 살아가던 모습은 너가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거야.”
말을 끝낸 교감선생이 백영사에서 나온 『국사대관』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p.332

다라국과 기문국은 「양직공도」 백제국사전에 “백제 곁에는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上己汶)⸱하침라 등과 같은 소국이 있고, 이들은 백제에 부용하고 있다”라는 기사에 각각 ‘다라’와 ‘상기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하얀 턱수염과 개량한복이 불쑥 튀어 나왔다. 원전 판독력이 어찌 그 모양이냐? 그 글자가 상사문(上巳文)이지, 상기문(上己汶)이냐? 텔레비전 카메라가 계속 돌아갔다. 야, 상갓집 개만도 못한 친일 사학자놈들아. 카메라가 개량한복을 향했다고 느끼는 순간,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판사 서평

연작소설 『가야사를 찾아서』는 현대(「가야를 찾아서」)와 현대(「가야를 위하여」) 사이에 고대(「가락국」)‧현대(「님의 나라」)‧고대(「검과 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창작한 작품을 배치하고 있다.
단편소설 「가야를 찾아서」의 화자 ‘나’(민기오)는 광고회사 사원이다. 사학과를 졸업한 ‘나’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밥벌이를 위해 들어간 곳이 대성기획이라는 해외광고 대행업체이다. 광고회사인지라 고객과 고객사를 찾아 구두 뒤창 수십 개가 닳도록 돌아다닌다. 명동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명동으로 고객사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나’는 자신이 밥벌이를 위해 뛰어다니다 닳아빠진 구두 뒤창 신세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광고 회사 사원 ‘나’의 구두 뒤창은 가야사로 상징되는 낭만과 열정의 세계와 대척적인 지점에 있다. 더구나 광고회사 사원인 ‘나’는 「가락국」이라는 중편소설을 쓰겠다는 불씨 하나를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서 일상에 함몰되어 몇 년째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밥벌이를 위해 광고 영업을 하러 구두 뒤창이 닳도록 뛰어다니는 ‘나’는 가야고분에서 나온 오르도스형청동솥에 빠져 있다.
“가야 문화에 미친 사나이 민기오와 광고회사 사원 차장 민기오란 별개의 인물일까. 이런 물음 속에 이 작품의 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실상 이것이 작가의 만만찮은 역량인 셈인데, 자연스러움이 그 증거. 한 인간에 있어 일상적 삶과 이와는 별개의 그가 품은 이상적 삶이란 가끔은 겹칠 수 있는 것. 이 교차점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견디게끔 하는 그 무엇이 아닐 것인가. 가령 업무차 만난 왕씨는 광개토왕 비석에 미친 사나이였는데, 가야사에 미친 사나이와 족히 맞설 수 있었다(김윤식, 「역사에의 열정과 그 근거-김종성」, 『90년대 한국소설의 표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p.275)”라는 평가를 받은 「가야를 찾아서」의 화자 ‘나’는 가야에 미친 사나이로 소설을 쓰겠다는 불씨 하나를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 함몰되어 있다가, 소설을 쓰지 못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 중편소설 「가락국」을 완성한다.
중편소설 「가락국」은 『가야를 찾아서』의 ‘안 이야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허황옥과 수로왕이다. 「가락국」은 허황옥이 인디아의 아유타국을 떠나 수로왕을 찾아가는 기나 긴 여정과 허황옥과 수로왕이 가락국을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가락국은 물길과 바닷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관문을 차지해 물길⸱바닷길 교통, 그리고 교역의 요지로서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 가운데 맨 위층에 자리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철과 물길과 바닷길이 풀무질한 교역의 거점인 가락국은 천구(天球) 위에 구름 띠 모양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천체(天體)의 무리인 은하의 중심부처럼 변한(弁韓) 정치집단의 중심부가 된 것이었다. 관문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가락국은 황산하를 사이로 두고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소국들의 움직임에 늘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동북쪽의 사로국 세력이 황산하를 향해 침투해오는 것도 문제지만, 서쪽의 안야국과 서남쪽의 고자미동국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아 군사력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다. 수로왕과 허왕후를 시작부터 끝까지 서사구조의 중심에 두고 도도히 흐르는 장강 같은 서사가 전개되는 「가락국」에서 작가가 힘을 들인 것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문양인 쌍어문의 묘사다. 쌍어문은 『가야를 찾아서』의 프롤로그 같은 단편소설 「가야를 찾아서」에도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의 시인 호머(Homer)의 대서사시 「오디세이(the Odyssey)」의 주인공 오디세이처럼 모험의 여행을 떠난 허황옥의 여정은 쌍어문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허황옥 일행이 쌍어문과 함께 떠난 여정은 아유타왕국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김해에 이르렀고, 수로왕의 조상 일행이 쌍어문과 함께 떠난 여정은 파미르고원에 위치했던 대원(大宛)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김해에 이르렀다. 허황옥과 수로왕은 가락국이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끼어 한나라를 따랐다가 흉노를 따랐다가 하던 누란(樓蘭)과 같은 운명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딸인 묘견은 바다가 가락국의 생명줄이고, 바다는 어머니처럼 온생명을 품어 준다고 생각했다. 묘견이 새로운 쌍어문을 찾아 왜로 향해 모험의 여행을 떠나면서 「가락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중편소설 「님의 나라」는 가야고분을 발굴하여 고고학 자료가 출토될 때마다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사학계와 언론의 허구를 잡지사 기자인 ‘나’의 눈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님의 나라」는 『가야를 찾아서』의 구성에서 ‘안 이야기’이면서 ‘안 이야기’ 「가락국」과 ‘안 이야기’ 「검과 현」을 이어주는 중간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광고회사 사원이었던 ‘나’는 회사가 경영난에 봉착하자, 역사교양 잡지인 역사문화사의 기자로 전직한다. ‘나’는 취재를 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북성대학 출신의 학자들과 남성대학 출신의 학자들이 광개토왕의 남정(南征), 임나(任那)의 지명 비정 등을 둘러싸고 암투에 가까운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한국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의 시각차를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잡지사 생활을 하면서 창작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서 우륵이라는 걸출한 음악가를 주인물(main character)로 하여 중편소설 「검(劍)과 현(弦)」을 집필한다. 가야사 국제학술회의에 같이 참가했던 사람들과 식당에서 모임을 갖던 중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획기적인 유물이 경상남도 함안에서 남성대학 고고학 연구소 발굴단에 의해서 발굴되었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화면에 마리산 고분군이 속살을 드러내자, 말갑옷이 화면에 나타났다. 말에까지 갑옷을 입히는 집단이 4세기대에 한반도 남부에 실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획기적인 자료입니다. 현 교수의 목소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온다. 그때 김우민이 가방을 어깨에 매며 “언제까지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을 겐가”하고 툭 던지듯이 말한다.
중편소설 「검(劍)과 현(弦)」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과 전라남북도 일원에 자리잡고 백제와 신라의 침략에 맞서 가야 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인 서기 500년부터 562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검(劍)으로 상징되는 성왕‧진흥왕‧가실왕의 얼굴 맞은편에 현(弦)으로 상징되는 우륵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다. 6세기라는 격동기를 살아갔던 우륵은 음악을 통해 가야 소국들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던 가실왕의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는 뜻에 따라 12현금(絃琴)을 만들고, 가야금 연주곡 12곡을 지었다. 가라가 어지러워지자, 551년(진흥왕 12년) 가라에서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세 제자에게 자신이 지은 12곡을 가르쳐주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을 배운 세 제자는 12곡이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아 매우 화를 냈던 우륵은 세 제자들이 줄인 5곡을 듣고 난 뒤에 “즐거우면서도 지나치게 즐겁지 않고, 슬프면서도 지나치게 슬프지 않구나. 이것이 정말 바른 음악이로구나”라고 말했다. 가야금 곡은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궁중음악이 되었다. 정치와 예술의 대립구도 속에 서역의 누란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가야 소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였던 우륵은 신라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안개를 헤치고 당항성을 향해 떠난다.
단편소설 「가야를 위하여」는 『가야를 찾아서』의 ‘바깥 이야기’로 『가야를 찾아서』의 에필로그 같은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28년만에 왕삼종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나’가 광고회사에 근무할 때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중국 변강민족연구소에서 『변강민족과 쌍어문』이라는 책을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화가 끝나자, ‘나’는 가야사 학술회의가 열리는 서현대학교 인문대학 강의동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집어 탄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어릴 적 일을 떠올린다. 교감선생으로부터 “역사책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세상을 살아가던 모습은 너가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거야”라는 훈화를 듣고, 초등학교를 졸업한다. ‘나’는 가정형편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탄광의 검탄부, 공사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독학으로 중‧고등학교 과정과 초급대학 과정을 마치고 대학 편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나’는 하루 12시간 곽삽으로 석탄을 퍼서 10톤 트럭에 싣는 노동으로 인해 온몸이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서울로 가서 공부해보겠다는 꿈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탄광촌에서 발버둥쳐온지 15년만에 34살의 나이에 대학 사학과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는다. ‘나’가 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게 한 것은 역사서였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여러 회사를 거쳐 역사인물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야사 학술회의에 참석한 ‘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인 기문국‧대사국‧다라국이 우리나라 역사서 어디에 나오냐면서 강단 사학자들을 친일학자라고 비난하는 재야 사학자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왕삼종이 전화를 해서 “‘상사문(上巳文)’이 아니고, ‘상기문(上己汶)’이라고 선명하게 나온 「양직공도」 백제국사전 필사본이 실린 책을 연구소 자료실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2024년 이병주국제문학상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