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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한국 현대문학

불울음 - 김주성

by 서연비람 2024. 2. 3.

한국현대문학전집
불울음
김주성 대표 작품선
김주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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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추악함과 비열함을 넘어 우리는 화해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김주성 작가의 대표작 『불울음』은 ‘1950년대 작가들, 이를테면 장용학, 이호철, 서기원 등처럼 실존적 허무주의에 침윤되어 있지도 않고 1970년대의 김원일, 김주영, 전상국 등에서처럼 감상적인 휴머니즘으로 채색되어 있지도 않다. 홍씨 가계의 후손인 홍명희와 나의 결혼 약속은 어떤 인위적인 장치, 또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0여 년 전 아버지의 죄-홍씨 가문의 재산을 도둑질한 것-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는 영수라는 인물도 살아 있고 홍씨 가계의 몰락을 한이나 증오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홍윤우라는 인물도 살아 있다.’ (반경환 평론가))

서연비람 한국현대문학전집 중 김주성 대표 작품선에는 장편소설 『불울음』과 10편의 중․단편소설들을 실었다. 직장인으로, 창작자로 살아온 김주성 작가의 대표 작품들을 통해 잃어버린 고향을 찾고, 화해에 이르는 길을 모색해 보자.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장편소설
불울음

제2부 중 ․ 단편소설
어느 똥개의 여름
邂逅(해후)
첫눈
겨울일기
실종
난파선
개 짖는 소리
서울, 2000년 가을
선택
젠틀맨

작품 해설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저자 소개

김주성 지음

1959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해후>가 당선되어 등단.
1989년 장편소설 『불울음』으로 삼성문학상 수상.
2014년 황순원문학 연구상 수상.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다년간 ‘글쓰기’ 강의.
 
소설집 『불울음』, 『어느 똥개의 여름』, 
저서 『공명조가 사는 나라』(공저), 『황순원 소설과 샤머니즘』 등이 있음.


책 속으로

불울음 p. 16~17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아니에요, 아직은…… 단지…… 내 마음이 옹졸한 탓이에요.”
나의 추궁하는 눈길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그녀는 돌아서버렸다.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다가가 그녀의 떨고 있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 내 흥분도 아직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어. 명희 아버님의 말씀처럼 이곳 방문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건데…….”
그녀의 떨림과 그만큼의 체온이 내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그렇다.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관용은 선악의 분별에 의한 것이기 보다 단순한 심정적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런 관용이 가해자의 죄에 대한 용서가 될 수는 없다. 용서란 어쩌면 가해자가 떠맡긴 피해자의 거북살스런 짐일 수도 있다. 용서한다고 말한다는 것이, 용서한다고 마음먹는 것이, 어찌 저질러진 죄를 말소시킬 수 있단 말인가. 흘러간 시간을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화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 불화에 대한 망각의 다짐에 불과하며 새로운 불화를 잉태시킬지라도 어쨌든 하나의 시작을 약속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화해의 선언으로 곧장 이전의 믿음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 깨어진 것은 깨어진 대로 버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용서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영역이다. 지상에 있다면 오직 용서받으려는 자만이 있을 수 있다. 실로 신만이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화해, 곧 망각의 다짐과 새 출발의 약속뿐이다. 
“진정해 내가 괜히 고집을 부렸어. 하지만 책임 질 당사자들은 다 떠나 버리고 이렇게 떠맡아야 할 책임만이 남아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겠어? 이럴 때 용서라든가 화해라든가 그런 낱말의 뜻이나 따지고 있어야 하겠어?"

불울음 p. 128~129

“아버지.”
참으로 오랜만에 내 입으로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그 소리는 분명 내 음성이었지만 벽 속에서라도 울려나오는 것처럼 생소했다. 아직 코흘리개였을 때 그렇게 불렀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역시 손님과 마주앉은 것처럼 나와의 이런 대면을 꽤 어색해 하는 눈치였다.
“꼭 해주셔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니까?”
“홍판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순간, 아버지는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이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한숨에 실어 이렇게 말했다.
“아다마다, 이 땅의 전 주인이었지.”
“그럼 홍판재라는 사람도 아시겠군요?”
“그 사람은 홍판술이 동생이다.”
“홍윤우씨는요?”
“홍판재 아들이다. 대체, 무얼 알고 싶은 게냐?”
아버지는 나의 당돌한 질문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있었지만 이 뜻밖의 사태에 매우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겁게 늘어진 눈꺼풀에 경련이 일고 있는 게 보였다.

잰틀맨p. 421~422

이런 사연을 듣고 있자니 강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전하려고 들고 온 그의 유품 봉투에서 안마시술소 영수증을 빼내 안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이것만은 그가 양부모에게 전해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소주 한 병 살 테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긋한 겉과 달리 속은 험악하기 짝이 없을 터라, 안마 받을 손님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캐묻다가 소득 없이 쫓겨나든지 더 나쁘면 빈 방으로 끌려가 봉변당하기 십상일 것 같아서였다.
역삼동 술집 골목 뒤편에 들어앉은 파라다이스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허름했다. 저녁 7시라 아직 한산한 편이었다. 김 형사에게 이번 프로젝트 성공하면 진짜 안마 한번 쏘겠다며 옆구리를 찔렀다. 중년 사내 둘이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았던 여자가 반색했다. 김 형사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걸치고 기대서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고 뭣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여자는 금세 얼굴색을 바꾸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김 형사가 지갑을 꺼내 슬쩍 펴보였다. 여자가 잠깐만요 하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아아, 단속 나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그냥 몇 가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면 돼요.”
여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영수증을 꺼내 펼쳐놓자 여자는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이게 왜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발행 날짜들을 짚으며 혹시 이 영수증을 끊어 준 손님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키 크고 얼굴 검은 아저씨 말이죠. 여자는 기억했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자세한 얘기는 그 손님을 모셨던 하 양에게 들으라면서 휴대폰으로 불러냈다. 하 양이 곧 카운터로 나왔다. 여자가 우리를 카운터 뒤편의 내실로 안내하고 차를 가져왔다. 하 양은 눈치를 살피면서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손님에 대한 비밀은 무덤까지 가슴에 담고 가겠다는 것이 자신의 신조라며 버텼다. 할 수 없이 김 형사가 그의 죽음을 말했다.

작품해설 :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p. 461~462

이밖에도 김주성의 사랑과 화해 혹은 관용이라는 주제는 단편소설 <邂逅>(해후)와 <실종>에도 여실히 그려져 있다. 이복 남매 혹은 원수 형제간의 갈등을 주제로 해서 ‘천수관음대비상’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邂逅>와 “이 반역의 시대에 허영심이나 채우고 있는 너 같은 사이비 지식분자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실종> p.**)는 회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꼭 화해의 술잔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생물학도의 회고담인 <실종>이 그렇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완벽한 神正論을 통해서 사랑과 화해 혹은 관용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회라면 현대 사회는 완벽한 무신론을 통해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나서고 있는 사회일지 모른다. 금욕주의를 통해서든 휴머니즘이나 이상주의를 통해서든 잃어버린 고향은 찾아져야 되는 것이지만, 소설은 그 잃어버린 고향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형상화함으로써 문학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고향도 없고 어떠한 선험적인 좌표도 있을 수 없다. 범죄와 광기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사랑과 화해와 관용도 가능하지 않고 또한 행복한 삶도 가능하지가 않다. 임철우가 <아버지의 땅>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김주성의 <邂逅>나 <실종> 그리고 <난파선> 등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지는 삶의 현장들이 그렇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역설한 바 있지만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비극의 진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고향에 대한 향수나 행복한 사회에 대한 청원이 서정적인 아름다운 문체를 낳게 되고 그 서정적인 아름다운 문체가 현대 사회에서의 진정제적인 효과를 낳게 된다. 아름다운 고향과 범죄와 광기만이 난무하는 사회, 행복한 사회와 행복하지 않은 사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작가들의 환멸과 이상주의가 교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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