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소설로 읽는 한국여성사 Ⅰ: 고대 중세 편』이 ㈜서연비람에서 출간되었다.
역사의 문학화를 내걸고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를 기획한 ㈜서연비람이 (사) 한국작가회의 회원 소설가 8인에게 집필을 의뢰한 8편의 신작 중단편소설은 한국사 속에 삶을 영위했던 여성들을 언어라는 존재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 (사)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회원 소설가 8인이 소설을 통해 한국여성사를 새로 쓴다.
영국의 역사학자 트레벨리언(George M. Trevelyan)은 “역사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의 설화성을 강조했다. 설화의 근간은 서사(narrative)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에서 서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유령처럼 떠돈다. 우리는 서사가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역사서의 기술에도 많이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상당 부분은 인물의 전기로 채워져 있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전기를 풍부하게 싣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서사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사·사회사·문학사·음악사·미술사·철학사·종교사상사·교육사·과학기술사·상업사·농업사·환경사·민중 운동사·여성사 등 한국문화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마침 한국문화사를 소설가들이 소설로 접근하면 어떻겠느냐는 논의를 진행해온 (주)서연비람이 (사)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소속 소설가들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 시리즈의 첫 번째 기획물인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Ⅰ:고대·중세편』과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Ⅱ:근세·현대편』을 계약하게 되었다.
(사)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회원들이 열심히 작품을 쓴 결과 총 17편의 중단편 소설이 모이게 되었다.
이 작품들 가운데 1편의 중편소설과 7편의 단편소설을 편집하여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Ⅰ:고대·중세편』을 출간하게 되었다.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Ⅰ:고대·중세편』에는 김종성 소설가가 집필한 중편소설 1편과 하아무·박선욱·엄광용·이진·정우련·김민주·유시연 소설가가 집필한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사)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소속 8명의 소설가들이 한국사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갔던 유화부인·낙랑공주·허황옥·도미부인·평강공주·선덕여왕·문명왕후·기황후를 언어라는 존재의 집으로 초대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탄탄한 문장으로 형상화했다.
‘한국여성사Ⅰ:고대·중세편’의 기획과 작가 섭외 등 전반적인 일에 유시연 간사와 류서재 간사의 노고가 컸다. 또한 난고를 수습해 아름다운 책으로 만들어준 (주)서연비람 윤진성 대표와 이상기 편집장을 비롯한 편집진의 노고도 컸다.
끝으로 내외 환경이 어려운 이때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창작 활동을 하는 (사)한국작가회의 회원 여러분들과 『소설로 읽는 한국 여성사Ⅰ:고대·중세편』을 출간하는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한다.
목차
머리말
1. 하아무 | 유화부인 - 유화의 씨주머니
2. 박선욱 | 낙랑공주 - 비운의 자명고
3. 김종성 | 허황옥 –가야를 찾아서
4. 엄광용 | 도미 부인-사랑의 지팡이
5. 이 진 | 평강공주 - 평강의 숲
6. 정우련 | 선덕여왕 - 여왕의 향기
7. 김민주 | 문명왕후 김문희 - 삼한통일의 어머니
8. 유시연 | 기황후 - 고원의 별
한국문화사 연표
집필 작가 소개
저자 소개
김민주
201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김만중 문학상 수상. 소설집 『화이트 밸런스』 등 출간. 현 내일을 여는 작가 초빙 편집위원
김종성
1986년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소설집 『마을』⸱ 『연리지가 있는 풍경』 등 출간.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박선욱
1982년 『실천문학』 신인문학상 시 당선.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수상. 시집 『풍찬노숙』, 장편소설 『조선의 별빛: 젊은 날의 홍대용』 등 출간. 전 도서출판 풀빛 상임 편집위원.
엄광용
1990년 월간 『한국문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류주현 문학상 수상. 대하소설 『광개토대왕 담덕』, 소설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등 출간. 현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
유시연
2003년 계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현진건문학상 수상.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 등 출간. 현 한국작가회의 소설분과 위원회 간사
이진
200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꽁지를 위한 방법서설』 등 출간. 전 광주여대 교수
정우련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부산작가상 수상. 소설집 『빈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등 출간. 전 부산외대 겸임교수
하아무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집 『마우스브리더』⸱ 『푸른 눈썹』 등 출간. 현 평사리문학관 사무국장
책 속으로
하아무 | 유화부인 - 유화의 씨주머니 p.25
“넌 상황이 심각한 것을 모르느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건만.”
유화는 주몽을 응시하며 엄하게 재우쳤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주몽은 머리를 숙였다. 예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리도 속절없이 빨리 흘러갈 줄 몰랐다. 유화는 주몽의 손을 잡았다. 떠나야 하는 아들을 책망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명심해야 한다. 너는 아버지의 나라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한다.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수없이 얘기했던 말이지만 다시 일깨워준다. 평소 같으면 주몽도 “제가 어찌 그렇게 큰일을 감당한단 말입니까” 의문을 제기했겠지만, 이 순간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유화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져가거라…….”
유화는 준비해두었던 것을 주몽 앞에 내어놓았다.
“씨주머니다.”
“예? 씨주머니?”
“다섯 가지 곡식의 종자니라. 보리와 콩, 조. 기장, 그리고 삼씨다. 잘 간수해 가져가거라.”
박선욱 | 낙랑공주 - 비운의 자명고 p.40~41
그날 저녁, 궁 안의 후원(後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여러 신하들과 장수들, 병사들이 궁 안의 커다란 연못 가에 마련된 길쭉한 소나무 탁자 앞에 앉아서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탁자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고기와 떡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탁자와 탁자 사이의 빈터에는 큼지막한 돌이 세워져 있었고, 그 속에 이글거리는 숯을 넣은 뒤 청동으로 만든 술동이를 올려놓아 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 앞을 지키고 선 하인들은 술을 채우라는 윗전의 명에 따라 분주히 탁자를 오가며 표주박으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높다란 누각 위에는 최리 왕과 호동왕자가 제법 규모가 큰 다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탁 위에는 검붉은 옻칠을 하고 금동 테를 두른 큼지막한 접시에 과일이 탐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다탁 아래쪽에는 청동으로 만든 곰 모양의 상다리 장식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 어서 한 잔 드시오!”
최리 왕이 호동왕자에게 먼저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곁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에게 명했다.
“공주를 모셔 오거라.”
“예, 대왕마마.”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휘장 안쪽에서 공주가 걸어와 최리 왕 옆에 앉았다. 하늘하늘한 옷차림이며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며,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공주 뒤에는 쟁반 위에 청동 병을 받쳐 든 시녀가 서 있었다.
“왕자! 내 딸이오.”
“아, 예.”
호동왕자는 일어서서 공주에게 예를 갖추었다.
“왕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공주님, 저는 고구려국 왕자 호동이라 합니다.”
엄광용 | 도미 부인 - 사랑의 지팡이 p. 140~141
부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장기를 두는 남편과 손님에게 말했다. 치마폭으로 감쌌지만, 그 자세는 예의범절이 있고 조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송진 기름이 타는 등잔불이지만, 다소곳이 숙인 그녀의 얼굴을 본 파계승 도림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보아온 세상의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절색의 주인공이 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파계승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도를 닦아 웬만해서는 여색을 탐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어쩌다 술이 거나해져 해롱거릴 때를 제외하곤 승려로서의 계율(戒律)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맨정신으로 여인에게 홀려보기는 처음이었다. 도림은 장기 두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등불 아래 비친 도미 부인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에 비하면 정작 도미는 장기에 몰두하여 장기판에서 도무지 눈을 뗄 줄 몰랐다.
도미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부어지는 도림의 뜨거운 눈길을 의식하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자와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더라도 여자로서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남편 도미는 장기판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때마침 도림은 양수겸장을 해놓은 상태에서 상대가 궁을 어디로 옮기던 죽게 생기도록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진 | 평강공주 - 평강의 숲 p.169
평강은 하루종일 안절부절이었다. 아직 소식이 올 때가 아니었건만 마음은 자꾸만 낙랑산으로 치달았다. 어린 시절엔 아버지 평원왕을 졸라 사냥대회 구경을 가곤 했었다. 기다란 꼬리를 끌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아버지의 화살, 위풍당당한 청년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지축을 뒤흔들던 말발굽 소리, 그리고 하늘에 올리는 장엄한 제사 의식.
그대가 사냥한 돼지와 사슴이 나라 제사의 희생물로 올려졌다는 소식이 당도하는 즉시, 혼례식을 준비할 것입니다.
벌써 몇 해째 되풀이된 주문이었다. 사냥대회가 끝나고 천지신명께 올리는 나라 제사에서 상품 대회 우승자가 사냥한 멧돼지와 사슴을 희생물로 올리는 건 고구려의 오랜 전통이었다. 평강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온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온달로서는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고, 아무리 노력한들 가능할 리 없다 싶었고, 무엇보다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평강의 그 허황된 요구는 언젠가부터 해내고 싶고 또 해내야 하는, 온달 평생의 소원이 되고 말았다.
하품 사냥대회에서 마침내 1등을 거머쥐던 날, 온달은 하늘을 향해 눈물을 뿌렸다. 마침내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리진 않겠다고. 어느 날 문득 나타나 자신의 전(全) 생을 뒤집어놓은, 이해 불가의 괴벽스런 계집에게 그동안의 모든 분노를 그러모아 사자처럼 달려들고야 말 거라고.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열릴 듯 열리지 않는 그녀의 탐스런 몸 저 깊은 곳에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내주고야 말 거라고. 그날부터 그의 1년은 온전히 이슬과 바위와의 싸움, 별과 바람과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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