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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인물/역사속 인물

[비람북스 인물시리즈] 미천왕 - 한반도에서 한사군을 축출하다

by 서연비람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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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나오는 미천왕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서사적인 뼈와 살을 만들어가는 소설창작의 작업은 힘든 고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웅대한 꿈을 따라 아득한 과거로 여행하는 가슴 설레는 기쁨이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과 나의 문학적 상상력이 서로 밀고 당기며 소년 을불이 하늘의 뜻을 받아 왕으로 등극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가는 용맹한 역사의 한복판으로 서슴없이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차

머리말

1. 시골로 도주하다
2. 사람의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3.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이 끼다
4.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오다
5. 미천지원에 묻히다

소설 미천왕 해설
미천왕 연보
소설 미천왕을 전후한 한국사 연표


저자 소개

오탁번 지음

1943년 충청북도 제천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철이와 아버지」 당선.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당선.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처형의 땅」 당선.
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시집 『오탁번 시전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소설전집 『오탁번 소설』 1. 2. 3. 4. 5. 6, 학술서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평론집 『현대문학산고』·『헛똑똑이의 시 읽기』· 『현대시의 이해』, 산문집 『시인과 개똥참외』·『오탁번 시화』· 『두루마리』 등이 있음.
동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수상.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책 속으로

시골로 도주하다 p.11~12

을불이 국내성을 떠난 것은 봉상왕 2년, 서기 293년 9월 열나흗날 이른 새벽이었다.
을불은 그때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성의 높은 담을 뛰어넘어 망루의 파수병에게 들키지 않고 성 밖의 마장까지 간다는 것은 을불 소년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나흗날 달은 서편으로 기운 채 환하게 밝았다. 만일 파수병의 눈에라도 띄는 날에는 영락없이 붙잡히고 말 것이었다.
열다섯 살이었지만 기골은 청년만큼 장대하고 여덟 팔 자로 째진 눈은 달빛을 되받아 무서운 야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왕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어젯밤 이슥해서였다. 을불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어젯밤에도 이슥하도록 활터에서 활을 쏘고 있었다. 을불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돌고를 따라 사냥터에서 활 솜씨를 익혀 이미 그의 궁술은 성안에서는 귀재로 이름이 나 있었다. 무예를 연마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한 가지를 익히면 다음이 더 어려워진다.

시골로 도주하다  p.30~31

한인들의 행패를 말로만 듣다가 직접 난민들을 만나니 새삼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았다. 고구려가 건국한 지 이미 3백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국기가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부족 연맹체의 성격을 띠고 있던 고구려는 안으로는 왕권을 둘러싼 분쟁과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그중에서도 고구려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한족과의 투쟁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한족과는 국지적인 투쟁을 했으나 고구려는 직접 북쪽의 대륙에 자리 잡은 한족들과 늘 정면 대결을 해야 했다. 북쪽뿐만이 아니었다. 남쪽으로는 패수 남쪽에 군치를 둔 낙랑군의 도전도 받아야 했으므로 아래위로 한족에 둘러싸여 나라를 보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골로 도주하다  p.37~38

꿈속에서 어머니 사미 부인이 나타나 눈물을 죽죽 흘리며 을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을불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다가 그만 돌에 정강이가 부딪쳐서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사방은 조용한 채 여름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만이 연못 위에서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연못에는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을불은 한동안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 생각에 휩싸여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 누가 돌을 던지지 않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다가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앉은 사람을 발견했다. 별빛이 부서져 내리며 연못 위에 빛났다.
“고단하신 모양이온데 잠을 청하지 않으시고…….”
바위 위에 앉은 사람은 을불이 다가가자 이렇게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개구리를 울지 않게 하는 일은 제가 주인한테서 받은 분부인데 낭자는 어떻게 여기 오셨소?”
“저는 고리의 자식으로 유라라고 합니다. 도령께서 늘 나무하러 다니는 것을 보고, 남의 집 머슴살이할 분이 아닌데 무슨 곡절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지요.”

시골로 도주하다  p.45~46

유라가 내준 말을 끌고 가서 소금과 바꾸어서 장사 밑천을 삼았다. 성을 나온 지 4년째가 된 을불은 이제는 왕족의 신분을 스스로 숨기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누가 보나 을불은 천민 태생의 장사꾼이요 농민이었지, 그가 왕족이라든가 무서운 활 솜씨를 가지고 있는 무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재모와 더불어 소금 짐을 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장사를 하기도 하고 하류 쪽으로 내려가서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몇 달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톡 까놓고 아무에게나 들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보게 재모. 우리 이렇게 땀 흘리고 소금 장사만 할 게 아니라, 거 왜, 을불이라든가 뭔가 하는 작자의 모자를 잡아 보는 게 어떤가?”
을불은 어느 날 소금 짐을 내려놓고 쉬면서 이렇게 말해 보았다. 그 말을 듣고 재모는 벌떡 일어서더니 침을 탁 뱉었다.
“자네는 상당히 교활하군.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이 고구려인의 기상이거늘 하물며 왕족의 목숨을 해하려 들다니, 자네 같은 인물과는 상종할 수가 없네그려.”
을불은 내심으로는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당장 자기를 뿌리치고 가 버리려는 재모 앞에서 우선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시골로 도주하다  p.56~58

“젊은이, 소금 좀 주지 않겠나? 아들이 노역을 나가서 소금이 떨어져서 속수무책이야.”
소금 짐을 맡겼던 민가의 노파가 허리를 구부리고 말했다.
“드리고말고요.”
을불은 소금을 푹푹 떠서 노파에게 주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은 검은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좀 더 주지 않겠나? 이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좀 더 주었다.
“이것 가지고는 안 되겠네. 조금 더 주지 않겠나…….”
노파는 막무가내로 손을 벌렸다. 재모가 보다 못해서 소금 짐을 가로채고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노파도 망령이지, 우리는 어떻게 하라구 소금을 거저 다 뺏으려는 게요?”
노파는 이에 원한을 품고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가마니 속에 감추어 놓고 이들이 짐을 지고 떠나자 뒤따라와서 압록 태수에게 을불이 신발을 훔쳐 갔다고 신고를 했다.
위로는 왕을 믿을 수 없고 아래로는 이웃을 믿을 수 없는 불신 풍조가 극에 달해 있었다. 노파의 이와 같은 행동에 분함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노파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가마니 속에서 노파의 신발이 나오자 영락없이 도둑 누명을 쓴 을불은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태수는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과 재모한테 태형을 가한 다음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