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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인물/역사속 인물

[비람북스 인물시리즈] 궁예 - 미륵용화세상을 꿈꾸다

by 서연비람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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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나는 숫자로 박힌 현대사 4·19, 5·16, 12·12, 5·18, 6·29의 현장을 한 금씩 통과하면서 성장하였다. 이긴 자의 손으로 쓴 역사의 기록이란 윤색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비로소, 고려 왕실의 정난정국공신이었던 김부식이 역사를 기록하기에 합당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궁예와 의형제를 맺은 덕분에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왕건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큰 은혜를 입었던 왕건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패륜과 모반’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가능한 한 궁예를 가혹하게 폄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매사에 실리보다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이건만, 유독 궁예의 억울함에 대해서만은 외면했다. 천년이 지났건만, 백성들의 용화세상을 열망했던 궁예를 재평가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오로지, 철원의 대득봉 기슭에서 토박이 어른들에게 궁예의 전설을 들으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던, 내 빚 갚음의 몫으로 남고 말았다.


목차

머리말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장편소설 궁예 해설
궁예 연보
장편소설 궁예를 전후한 한국사 연표
장편소설 궁예 등장인물
참고문헌
지도


저자 소개

강선 지음

충남 홍성 출생(본명 강병석).
동아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낱말찾기」 당선.
월간문학신인상 시 민벌에서 부는 바람수상.
한국소설문학상, 노근리평화상(문학),
월간문학동리상 등 수상.

동아일보 기자, 계간문예 편집장,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등 역임.

소설집 『낱말찾기』, 『어둠꽃』, 『여름하늘』
장편소설 『서있는 자의 꿈』, 『누가 너를 시인이라 불렀는가』, 『궁예』(전 3권), 『초록의 전설』, 『활자』
시집 『넝쿨담장』, 『오월에 날아온 수상한 꽃가루』, 『사랑쌓기』 등 출간.


책 속으로

1 p.13~14

백마산성 솔숲을 뚫고 말 한 필이 빠르게 올라왔다.
“종뢰선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종스님도 안녕하신가?”
왕륭이 호기롭게 인사를 건넸다. 흥교사 법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던 최우달과 왕건이 나란히 나왔다. 아들 왕건을 바라보는 왕륭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예전의 백마산성 좌장이 아니었다. 어느덧 늠름한 풍모가 몸에 밴 송악성 성주였다.
지난해에는 왜구 출몰을 알리는 봉화가 잦았다. 올여름에는 힘깨나 쓰는 지방 호족들이 너도나도 장군 깃발을 올린다는 풍문이 돌았다. 사실여부 확인할 틈도 없이 가을이 왔다. 송악성에서도 일이 터졌다. 하룻밤 사이에 송악군 태수와 개성군 태수가 자취를 감췄다.
인근 고을 좌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쨌든 새 군태수가 부임할 때까지 공무를 살필 관장은 있어야 하오.”
“난세올시다. 게다가 잠시 맡았다가 뱉어낼 자리외다.”
“그렇소이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따르게 될 임시 관장이니, 이쪽저쪽 잇속 챙기기 다툼에 말려들어 욕먹기 딱 좋은 자리외다. 누가 나서겠소이까.”
“송악군과 개성군을 합칩시다. 관아를 송악성 하나로 줄이고, 성주를 세웁시다.”
“명안이외다. 성주 자리를 누가 맡느냐가 또 문제올시다.”
“저기 있는 백마산성 좌장 왕륭이 어떻소이까. 그동안 흥교사 무예도장에서 길러낸 무사들이 적지 않을 것이외다.”
사람들이 임시라고 우습게 여겼던 송악성 성주 자리가 해를 넘기면서 뿌리를 깊숙이 내렸다. 왜구들에 대항하다

2 p.25~26

“원종 보병대감이 장군에게 따지고 들다가 하옥되었소이다.”
상주 관내에 자리 잡은 음리화정. 군사 하나가 군막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그 소리가 흙바닥에 구르기도 전에 마병대감 애노가 안장도 없는 말에 채찍을 휘둘렀다.
“원종대감은 어디 있느냐?”
벽력같은 고함에 옥졸들이 길을 틔웠다. 애노가 칼을 뽑아 창살 하나를 빗겨 그었다. 원종이 빠져나오며 툴툴거렸다.
“일을 크게 벌일 참이던가?”
애노가 손끝으로 옥졸들에게 명했다.
“뇌옥 문을 열고 여기로 데려와라.”
죄 없는 죄수들이었다. 풀려난 군사들이 뇌옥 앞에 늘어앉기를 기다렸다가 애노가 원종을 향해 돌아섰다.
“장군에게 뭘 따졌느냐?”
원종이 주먹을 내밀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펼쳤다.
“첫째는, 요즘 들어 군사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둘째는, 군사들에게 하루 두 끼씩만 주던 밥이 그나마 죽으로 바뀌었다. 셋째는, 먹은 게 없는 군사들을 더 혹독하게 닦달한다. 이것들을 물었을 뿐이다.”
애노가 군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원종대감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서슴지 말고 앞으로 나서라.”
군사들이나 옥졸들이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3 p.36~37

말 상대를 찾아낸 궁예의 외눈이 반짝 빛났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사내가 아예 궁예의 옆으로 옮겨왔다. 그러자 옆에서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손님께서 가는 길에 미륵부처님을 만나거든 빌어 주시오. 기훤의 행패가 심하니, 하루빨리 오셔서 백성들을 구해주십사, 하고 말이오.”
“당초에는 벼슬아치들의 패악이 자심하여 백성들이 떨쳐 일어났던 건데, 어느새 벼슬아치보다 나을 게 없는 건달장군의 세상이 되고 말았소이다.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용화세상을 만들어주시기를 바라는 수밖에, 소망이 없소이다.”
“장군 거처에서 잡일 하는 백성들도 죽주산성 사람이외다. 뚜껑을 덮어놔도 냄새는 풍겨 나오게 마련이외다. 안다 해서 또 무얼 하겠소이까? 그런 말 입 밖에 냈다가는 반달성이라던가, 뇌옥에 갇히는 게 고작이니 모르는 게 약이지요.”
“동네사람 하나는 새끼 밴 암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죽을 만큼 얻어맞고 갇혔소이다. 기훤장군 몸보신에 암소 배를 갈라 송치를 꺼내다 바치겠다니, 억장이 무너질밖에. 벼슬아치들보다 눈곱만큼도 나을 게 없구나, 악을 쓰다가 잡혀갔지요. 죽어나는 것은 백성들뿐이니, 목이 빠져라 미륵부처님을 기다리는 겝니다.”
남편의 제지를 받고 말을 끊었던 젊은 아낙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손님. 과연, 미륵부처님은 언제나 오신대요?”

4 p.56

궁예를 비롯한 대원들은 나눠주는 대로 활과 화살이 든 전통 하나씩을 받아 들고 성벽으로 기어올랐다. 대나무가 흔한 고장이라 화살은 쓸 만했지만, 활은 아이들 장난감 같은 약궁이었다. 적군이 활 한바탕 저쪽 밭머리까지 밀려와 있었다. 비탈밭에서는 목 잘린 수숫대와 이삭 잘린 조대가 바람결에 몸을 맞비비며 서걱거렸다. 성벽 위 군사들이 활을 쏘긴 했으나, 마파람에 절반도 못 날아가 눈밭에 떨어졌다.
적진에서 말 탄 장수 셋이 나란히 나섰다. 장수들이 활시위를 놓았다. 바람을 업은 화살이 성벽에 닿지 못하고 눈밭에 떨어졌다. 장수들이 다시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는 성벽 중간을 툭툭툭 때렸다. 장수들이 앞으로 움직였다.
“활 좀 빌려주게.”
궁예가 들고 있던 장난감 같은 활을 던져놓고 손을 내밀었다. 원회가 선뜻 건넨 활시위를 서너 번 튀겨본 궁예가 한꺼번에 화살 세 개를 매겼다. 대원들이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고개를 돌리는 사이, 화살 세 개가 연거푸 허공을 꿰었다.

5 p.86~87

“내일 날이 밝거든 곧장 명주 땅으로 떠나거라.”
“…….”
궁예가 미처 대답을 못 찾고 어물거리자, 원종의 말투가 간곡하게 변했다.
“양길대장군은 오랜 세월 너를 위해 기반을 닦아왔다. 허나, 지켜본 바와 같이, 단번에 네게 넘겨주기는 어렵게 돼있다. 휘하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제 잇속을 챙기자고 모여들었을 뿐, 백성들이야 어찌 되든 관심이 없다. 뜻으로 모이지 못하고 밥을 좇아 모였기에 그 모양이다. 그런 자들과 갈라서기로 작정만 한다면 안 될 것은 없으나, 그네들은 당장에 견훤에게 붙을 것이다. 뜻을 펴볼 새도 없이 수많은 적과 맞서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원종이 궁예를 그윽이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견훤이 왕위에 올랐으니, 양길대장군이 왕위에 올라야만 하게 될 수도 있단 말이다. 마병대를 이끌고 산을 넘도록 해라. 그 마병대야말로 양길대장군이 정성을 다해 길러낸 일당백의 정예다. 명주를 수중에 넣거든, 여세를 몰아 한수 북쪽을 평정토록 해라. 수중에 열 개의 군현이 들어오거든, 양길대장군을 북원대장군에 봉한다는 첩지를 보내라. 너의 세력이 커진 다음에는 청길, 신훤이 아니라 그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양길대장군이 직접 결정한 일이다. 알겠느냐?”
말을 끝낸 원종이 품속에서 깃발을 꺼내주었다.
“양길대장군이 마련한 깃발이다. 네 어머니가 직접 수를 놓았다더구나. 명주 땅에 들어서거든 이걸 달도록 하여라.”
비단 위에 오색 수실로 수를 놓은 장군기였다. 궁예가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펼쳤다.
“대장군 궁예.”
궁예의 하나밖에 없는 눈에 주먹만 한 눈물이 디룽디룽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