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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인물/역사속 인물

[비람북스 인물시리즈] 김대건 - 한국 최초의 순교 사제

by 서연비람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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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김대건 신부는 18579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의 칭호를 받았고, 192575일에 성인 위에 오르셨습니다. 로마교황청에서는 매년 75일을 성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하고, 그날이 되면 교우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위한 기도와 묵상을 합니다. 지금 그의 유해는 가톨릭대학 신학부 성당에 모셔져서 신학생들의 교부가 되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순교자들의 피로 우뚝 선 것처럼, 조선교구 또한 신앙 선조들이 흘린 순교의 피로 대성당이 우뚝 섰습니다. 조선의 대원군 시대를 끝으로 이 땅에는 천주교 박해가 끝났고, 김대건 신부님이 조선 땅에서 새벽에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싶어 하시던 그 열망은 끝내 이루었습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등산포 일기
추억의 그림자
골배마실에서 만나다
하느님은 누군가
금지된 하늘
성 이그나시오의 순교
샤스땅의 편지
마카오의 신학교
커다란 종이호랑이
국경에서 만난 밀사
어서, 일어나 걸어라
만주 횡단

제2장
뱃길을 열어라
나침반과 항해지도
요나의 돛배
땅에서 맺힌 것은 땅에서 풀어라
내가 너를 선택했다
라파엘 호의 표류
숨어있는 마을
서로의 천사가 되다
주여 당신이름
나무 조각에 붙은 영혼
붉은 포승줄
세계지도를 바치다
김대건 구명 탄원서
사랑하는 형제여

김대건 해설
김대건 신부 연보
김대건을 전후한 한국사 연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유호종 지음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과 졸업
기독교방송 프로듀서와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를 거쳐 전업 작가로 활동.

1974년 제14회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시 「달빛소리」로 신인상 수상.
1976 월간 현대문학의 소설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1984년 장편소설 『불의 회상』으로 대한민국 문학상 소설 부문 신인상 수상.
1986년 중편소설 『서울에서의 외로운 몽상』으로 제4회 소설문학 작품상을 수상.

주요 작품 『새롭게 읽는 명성황후』, 『왕국의 징소리』, 『하얼빈 리포트』, 『서울무지개』, 『조용한 남자』, 『수녀 아가다』, 『유리열쇠』, 『아사의 나라』, 『천년의 눈물』, 『불새』, 『슬픔의 재즈』, 『치자꽃 전설』,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등.


책 속으로

등산포 일기 p.18~19

마카오에 있는 그림이 그려진 봉투 석 장, 여덟 쪽 병풍 그림이며 구리로 만든 요강 세 개, 조선에서 순교한 서양 신부님들의 유품이 든 누런 주머니, 이머 스승 리바 신부에게 보내는 조선의 한지 스무 장, 조선 그리빗 세 개, 붓 네 개가 든 꾸러미도 들어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항해 도중 세필로 그린 조선지도는 훗날 1855년 파리 왕립도서관에 입수되어, 프랑스의 지리학회지에 발표되었다. 프랑스 생 마르탱 생 마르탱: 프랑스의 성인 수도자.
의 「세계지리사전」에는 <김대건의 조선전도> 원본이 수록되어 있고, 그 지도는 현재는 파리국립도서관 지도부에 소장된 품목이다. 김 신부는 중국 선장들과 얘기가 잘 되어 만주에서 조선 입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모셔 올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쳐서 등산포로 다시 귀항했다
.

추억의 그림자 p.37~38

그 해 1836년 봄, 모방 신부는 교우들이 숨어 사는 산골 골배마실에서 소년 김재복을 처음 만났다.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 이름은 김재복이었지만 훗날 조부가 그에게 큰 뜻을 세우라는 뜻으로 이름을 김대건으로 바꾸어주었다. 당시 은이 마을의 공소에서 미사 첨례를 하던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이그나시오는 모방 신부로부터 해외에 유학시킬 신학생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때 마침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그는 아들을 모방 신부에게 데려갔다.
바로 이 애가 제 아들 김재복입니다.”
모방 신부는 소년 김재복이 착하고 성실한 데다가 순교자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이라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15살이었던 김재복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신학교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어서 남몰래 마음속으로 그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모방 신부를 만나자 가슴이 뛰었다. 골배마실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있던 산골 소년 김재복에게 모방 신부는 하늘이 보내준 전령이나 다름없었다.

성 이그나시오의 순교 p.67~68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에 나선 좌우정 이지연은 김효임, 김효주를 비롯하여 허계임, 홍금주 등 양반 가문의 딸 십여 명을 전격적으로 참수시켰다. 앵베르 주교와 두 서양 선교사를 자수시키기 위한 압박하기 위해 교우들을 계속 희생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희생을 숨어서 지켜볼 수가 없었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써야 했다. 마침내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청나라로 보내고 혼자 자수할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두 신부는 앵베르 주교에게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먼저 배교자 김순성의 밀고로 포졸 5명이 일꾼으로 위장하고 앵베르 주교를 찾아왔다. 자수를 결심하고 있던 앵베르 주교는 포졸들의 붉은 밧줄을 순순히 받았다. 좌포도청 손계창은 그를 정치범을 체포할 때만 쓰는 붉은 밧줄로 포박해서 연행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각기 새 은신처를 찾아 떠난 후에야 이미 체포되어 감옥에 있던 앵베르 주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라틴어 전문으로 씌어있었다.
무릇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신부님들께서 아직 배를 타지 않으셨다면 좌포장 손계창에게 자수하기를 바랍니다. 교우는 한 사람도 따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이 사제로 인해서 계속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알 수 있다. 포청에서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앵베르 주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교우들을 대신 계속 처형시키고 있었다.

샤스땅의 편지 p.81~82

주여! 제 영혼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김대건 신부는 두 손을 움켜잡고 속으로 크게 외쳤다. 목이 메어 기도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10년 전에 있었던 세 신부의 사형 장면은 마치 지금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세 신부가 참형을 받은 후에 순교한 교우 중에는 정하상의 어머니가 옥사했다. 정하상과 정정혜 남매가 서소문에서 참수 치명되었다. 역관 유진길이 참수되었으며, 그의 어린 아들 유대철은 교수형,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은 형조에서 맞아서 옥사했다. 북경 동지사의 마부 조신철은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이그나시오와 함께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를 당했다.
주여! 아버님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김대건 신부는 기해년 9월 26일에 아버지를 잃은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김 신부는 15살 때 은이 마을 공소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후 이번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꿈속에서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의 손에 이끌려 한양으로 떠나던 날, 김 신부의 부모님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아들이 사제가 되어 돌아온 것을 천국에서 내려다보고 기뻐하셨을까? 김 신부는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는 집안의 어르신들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앞섰다. 부모님과 은이 마을에 함께 살 때는 너무 어려서 효도도 제대로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이 통한이 되어 가슴속에서 사무쳤다. 많은 교우가 함께 고난을 겪고 끝내는 참형을 당했기에 유독 아버지를 잃은 고통만 더 크게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제로서의 애틋한 감정이긴 해도, 그 죄스러움과 한스러움은 피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토록 큰 환난 속에서 그처럼 처참하게 모두들 하느님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국경에서 만난 밀사 p.118~119

김대건은 만주 변문 근처에서 조선인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옷 속에는 은돈 1백 냥과 금돈 40냥을 단단히 꿰매어 넣고, 비상식량으로 준비한 빵과 소금에 절인 생선도 허리에 찼다. 그는 나무꾼 행색을 갖추기 위해 지게를 마련하여 등에 나무를 잔뜩 짊어지고 중국 변문에서 다소 먼 국경지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김 방지거의 조언대로 나무꾼으로 위장하여 변방의 국경선을 넘는 것이 국경 수비대를 속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다. 김대건은 다음 날 새벽부터 해 저물녘까지 하루 1백30리 길을 꼬박 걸어서 얼어붙은 압록강 위를 조심조심 발을 떼었다. 압록강의 칼바람은 뺨을 도려낼 듯 매서웠다. 오랜만에 밟는 고국 땅의 냉대가 너무 냉혹했다. 그는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고꾸라지고 엎어지면서 압록강을 겨우 건너 해 질 무렵쯤에 의주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그는 조선인 교우들을 만나서 페레올 주교를 안전하게 입국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과제였다. 지금, 조국은 슬픈 땅이다. 아버지는 참형당했고,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조선에는 앵베르 주교도, 영원한 첫 스승 모방 신부도 샤스탕 신부도 모두 저세상으로 가고 없다. 해 질 녘, 석양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면 가슴 한구석에서 슬픔이 안개처럼 자욱하고 스산하게 덮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