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궁궐 속 여인들의 사랑 이야기
서연비람에서는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문학적 상상력을 기르고, 문학이 주는 감동과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작품들을 선정하여 <서연비람 고전 문학 전집>을 출간하고 있다. <서연비람 고전 문학 전집>은 청소년들에게는 학습서로, 일반인에게는 교양서로 읽힐 수 있게 우리 고전을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서연비람 고전 문학 전집> 아홉 번째 작품으로 『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운영전/영영전』을 한데 묶어 출간하였다.
「운영전」과 「영영전」은 여러 모로 닮은 점이 많은 두 작품이다. 각 작품이 서로의 거울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가 나머지 하나의 그림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궁녀와 선비라는 주인공의 신분이 동일하고, 금지된 사랑을 꿈꾼다는 기본적인 설정 또한 차이가 없다. 물론 두 작품은 결말 구조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내지만, 인물 구도를 비롯하여 서사의 진행에 활용된 많은 요소들이 일부러 의도한 것처럼 겹쳐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영전(雲英傳)」은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집 수성궁(壽城宮)을 배경으로 궁녀 운영과 선비 김 진사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고전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극적 성격의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운영전」에는 궁궐이라는 두텁고 높은 장벽 안에 숨겨진 궁녀들의 비밀스러운 탄식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비극적 결말로 귀결되기는 하지만, 한계 상황을 뛰어넘으려는 인물들의 비장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운영전」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자유연애를 향한 주인공의 무모해 보이는 적극적 행동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쩍 성장한 과감한 시대 의식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궁녀들이 보여 준 죽음을 불사한 연대와 협력은 자유를 억압하는 당대적 질서에 저항하고, 유린당한 인권을 회복하려는 필사의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운영전」은 당대 모순의 폭로와 비판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신분적인 제약을 넘어 사랑하다가 희생된 주인공의 운명이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구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영전」은 일반적인 고전소설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전기적 요소의 개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이다. 철저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소재로 하여 구성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내용을 지닌 「운영전」의 비극적 결말과 달리, 이 작품은 주인공 남녀의 사랑이 현세에서 성취되는 행복한 결말을 택함으로써 큰 차이를 드러내지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비현실적 모티프를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영영전」의 두 주인공 김생과 영영이 사랑을 이루는 공간은 다름 아닌 현실의 공간이며,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우연이 아닌 필연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작품 속 시간과 공간은 철저히 계산되어 있고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뛰어난 구성력과 현실감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이 작품은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권선징악을 시도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남녀의 애정에 초점을 맞추어 관념적인 세계보다는 감정의 문제에 충실했다. 그리하여 현실적이고도 모험적인 사랑을 파격적으로 보여 준 보기 드문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영영전」의 여성 주인공인 영영부터 「운영전」의 운영을 꼭 닮았다.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목차
책머리에
「운영전」과 「영영전」을 읽기 전에
「운영전」
선비 유영의 수성궁 나들이
수성궁 달밤의 기이한 만남
안평 대군과 궁녀 열 명
숨겨 둔 마음을 털어놓다
벽 틈으로 전한 편지
옥 같은 얼굴은 눈에 있는데
궁녀들의 우정
위험한 사랑
특의 흉계와 대군의 의심
들켜 버린 비밀
다음 생을 기약하며
주인 없는 수성궁에 봄빛은 옛날과 같은데
작품 해설 「운영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영영전」
첫눈에 반하다
막동의 꾀
너무 짧았던 만남
허물어진 담장 틈으로
생이별의 슬픔
변치 않는 그리움
마침내 이룬 사랑
작품 해설 「영영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 「운영전」과 겹쳐 읽기
해설 「운영전」과 「영영전」에 대하여
저자 소개
최성윤 엮음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문화일보 추계문예공모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
순천향대, 강원대 등 다수의 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였으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 교수를 지냈다.
현재 상지대학교 교양 대학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계몽과 통속의 소설사』, 『전망 없는 시대, 전망을 찾는 소설』이 있으며
공저 논문집으로는 『김유정의 귀환』, 『한국학 사전의 편찬의 현황』, 『김유정과 동시대 문학 연구』, 『군산의 근대 풍경:역사와 문화』 등이 있다.
서연비람 고전 문학 전집 『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홍길동전』,『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구운몽』, 『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허생전/양반전』, 『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최척전/주생전』 , 『최성윤 교수와 함께 읽는 운영전/영영전』 이 있다.
책 속으로
책머리에 p.9
「운영전(雲英傳)」과 「영영전(英英傳)」을 한데 묶는다. 각각 ‘수성궁몽유록(壽聖宮夢遊錄)’, ‘상사동기(相思洞記)’라는 제목으로도 일컬어지는 두 작품은 왕족의 사적인 궁궐 안에서 생활하는 궁녀와 재주 있고 용모 준수한 선비의 사랑을 소재로 채택하고 있다. 말하자면 ‘금지된 사랑’인 셈인데, 당대 봉건사회의 제도가 쌓아 놓은 높은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인물들의 투쟁이 기본 서사의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서로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의 이름을 달리하고 있기는 하나 「운영전」과 「영영전」은 위와 같이 여러 모로 공통점이 많은 작품들이다. 「운영전」의 ‘특’이나 「영영전」의 ‘막동’과 같이 꾀 많은 하인이 등장한다는 점, 「운영전」의 ‘무녀’나 「영영전」의 ‘노파’처럼 두 연인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하다.
반면 두 작품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역시 결말 구조에 있다. 「운영전」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스러움을 주된 정조로 한 작품이라면, 「영영전」은 금기를 뛰어넘어 결국 ‘사랑을 성취’하는 행복한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운영전 - 수성궁 달밤의 기이한 만남 p.27~28
“제 성은 김가(金哥)입니다. 열 살에 이미 시와 문장의 이치를 알아 글재주로 이름이 났습니다. 열네 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저를 김 진사라고 불렀지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넘치는 혈기와 호탕한 마음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또 그때 만난 여인과의 인연 때문에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을 지키지 못하고 일찍 목숨을 끊어 천지간의 큰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죄인의 이름을 왜 꼭 알려고 애쓰십니까?”
젊은이는 옆에 앉은 여인과 뒤에 나란히 선 시녀들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창연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의 일이 떠오른 것인지 여인들의 얼굴에도 슬픈 빛이 서렸다. 젊은이는 유영에게 여인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운영(雲英)입니다. 저 두 여인의 이름은 녹주(緣珠)와 송옥(宋玉)입니다. 이들은 모두 옛날 안평 대군의 궁녀였습니다.”
유영은 그제야 이들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평 대군의 궁녀요, 그 시대의 선비라니……. 이미 허물어졌으나 그 고색창연한 흔적마저 아름다운 수성궁처럼 이들의 옛적 사랑도 맑고 우아했을 것 같았다.
“진사께서 말씀을 꺼내시긴 했으나 여기서 멈춘다면 제겐 충분치 않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안평 대군이 활약하던 당시의 일을 소상히 알고 계시겠군요. 대군과 혹시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그런데 진사께서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왜 이리 상심하시는 겁니까? 외람되지만 그 곡절을 제가 들을 수 있겠는지요?”
진사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운영을 바라보았다.
“해가 여러 번 바뀌어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는데, 그 오래 전 일을 당신은 자세히 기억할 수 있겠소?”
운영이 대답했다.
“가슴속에 깊이 맺힌 원한인데 그동안 어느 날인들 잊고 살았겠습니까?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볼 터이니 낭군께서 들으시면서 기록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제가 빠뜨린 것이 있으면 덧붙여 주십시오.”
운영은 또 시녀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너는 먹을 갈아 주겠느냐?”
밤하늘에 퍼지는 나직하고도 맑은 목소리를 따라 운영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김 진사의 붓은 달빛 아래 흰 종이 위를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영영전 - 너무 짧았던 만남 p.194~195
마침내 노파와 약속했던 단옷날이 되었다. 김생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노파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별일 없었느냐는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다른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오?”
노파는 헐레벌떡 달려온 그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제 회산군 댁을 찾아갔습니다. 부인께 간절하게 청하였지요. 그러자 부인께서는 ‘회산군께서 평소에 영영의 바깥출입을 엄하게 금하시므로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수가 없구나. 그러나 혹여 내일 조정 대신들의 초대로 나리께서 단오 모임에 가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영영에게 잠시 말미를 줄 수도 있겠다’ 하시더군요. 부인께서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회산군께서 외출하실지 여부는 저야 알 수가 있나요?”
김생은 반신반의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하면서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초조하게 책상에 기대어 앉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을 내다보며 기다렸지만, 거의 정오가 가까웠는데도 영영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점점 답답해지고 애가 타서 우두커니 앉아 멍하니 있노라니 김생의 몰골은 마치 서리를 맞은 파리처럼 보였다.
김생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부채로 기둥을 치면서 노파를 불러 말했다.
“근심하느라 애가 끊어지고 목을 빼고 바라보노라니 눈이 다 침침하오. 거리에는 행인들이 오고 가지만, 기다리는 영영은 아니니 내 소원은 물거품이 되는가 보오.”
노파는 혀를 끌끌 차며 김생을 달랬다.
“나리,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지시지요.”
「영영전」 꼼꼼히 들여다보기 p.243~245
7. ‘빨래하는 날’과 ‘단옷날’
「영영전」의 김생과 영영은 결말 부분에서의 혼인 이전에 작품 전체를 통해 단 네 번 만난다. 발단 부분에서 김생이 성균관을 나와 귀가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첫 번째 만남이다. 두 번째 만남은 상사동 노파가 김생의 부탁으로 꾀를 내어 영영을 궁 밖으로 나오게끔 한 날, 즉 단옷날의 만남이다. 세 번째는 영영의 인도로 김생이 궁궐 안에 진입하였던 보름날의 만남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김생이 장원 급제 이후 유가를 돌다가 취한 척 말에서 일부러 떨어지고, 회산군 댁에 들어가 차를 얻어 마시던 때의 순간적인 마주침이다.
이 중 두 번째 만남인 단옷날의 만남은 「운영전」의 비단옷 빨래하는 날의 만남과 겹쳐 놓고 비교할 만하다. 「운영전」의 김 진사와 운영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상사병에 빠졌을 때, 궁궐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날을 이용하여 만날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도 만남의 장소는 메신저 역할을 하던 무녀의 집이었다.
「영영전」에서도 궁녀 영영이 외출할 수 있는 날을 고르고 그때를 이용하여 만날 기회를 잡으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시기는 음력 오월 오일 단옷날이고, 장소는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 주는 끈인 노파의 상사동 집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김생은 눈을 번쩍 뜨고 노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파는 그래도 주저주저하다가 마침내 마음속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한 달 지나면 단오 때가 되지 않습니까? 단옷날 이 늙은이가 죽은 언니를 위해 다시 한번 제사상을 차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부인께 아뢰고 우리 영영에게 반나절만 말미를 주십사 청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만에 하나라도 나리가 원하시는 바를 이룰 기회가 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만 돌아가셔서 때를 기다려 보시지요.”
만에 하나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김생은 일이 다 된 것처럼 기뻐하며 노파에게 거듭 사례했다.
“노인의 말씀대로 되기만 한다면 인간 세상의 오월 오일은 곧 천상의 칠월 칠일이나 다를 바가 없겠구려.”
「운영전」에서 빨래하는 날의 만남, 「영영전」에서 단옷날의 만남은 아쉬움만 남기고 일단 끝나게 되지만, 이후의 만남과 죽음을 무릅쓴 사랑을 기약하는 기점으로서의 의미 또한 지닌다. 「 운영전」의 사랑이 한동안 지속되는 데 비해 「영영전」의 위험한 사랑은 단 한 번으로 끝난다. 대신 「영영전」은 사별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생이별의 기간을 그사이에 배치해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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